음악으로 꿈을 그리는 야심찬 몽상가, 작곡가 이호섭 동문(국문 석12 / 박15)
작성자 서강가젯(Sogang gazette)
작성일 2019.09.09 15:17:55
조회 3,080





  


▲ 이호섭 동문(국문 석12 / 박15 )



대한민국 트로트계의 트렌드 리더, 손만 대면 히트곡을 탄생시키는 유행 제조기. 작곡가 이호섭 동문을 설명할 때 줄곧 달리는 이름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에게는, 뭔진 몰라도 ‘항상 웃는 사람’, ‘항상 싱글거리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먼저 따라붙는다. 특유의 긍정 에너지와 넘치는 유쾌함으로 전 국민의 가슴에 자리를 잡은 뜨거운 남자 이호섭 동문. 그러나 그가 이렇게 현재의 밝음을 갖추기 이전에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힘든 시절이 있었다. 지속한 역경 끝에, 심지어는 모든 걸 포기하고 삶을 끝맺으려 했었던. 그런 그가 대한민국의 90년대를 주름잡은 트렌드 리더로 눈부시게 성장한 바탕은 무엇일까? 서강가젯이 직접 이호섭 동문을 만나 그간의 이야기와 함께, 서강대 대학원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의 아름다운 도전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잠깐만>, <다함께 차차차>, <찬찬찬>… 첫 멜로디만 들어도 누구나 알 만한 이 노래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호섭 동문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중독성 강한 멜로디와 깊은 가사로 잘 알려진 이호섭 작곡가는, 단연 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일인자 리더였다. 히트곡들을 연달아 발표하며 주현미, 박남정, 김현철 등의 가수들을 일약 스타덤에 앉힌 장본인인 그. 그러나 그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2, 돌연 서강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며 인생 제2의 도전을 시작. 궁극적으로는 대중문화를 통해 국민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연구하고 싶다는 그의 비전은 무궁했다. 끝나지 않은 그의 도전, 지치지 않는 그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삶의 끝에서 새로운 삶을 엿보다  


밝음의 뒤에는 어두움이 자리하기 마련, 이호섭 동문 또한 지금의 밝은 모습을 갖추기까지 유독 힘든 세월을 거쳐 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어둠이 있었기에 이호섭 동문의 현재가 더욱 빛나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한 사연과 자살 시도까지산전수전, 아픈 만큼 그를 성장시켰다는 인생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안녕하세요 동문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동문님께서 많은 매스컴에서 그동안의 살아오신 이야기를 해 주신 걸 보았습니다. 동문님의 인생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


어릴 때 경험한 큰 좌절이 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죠. 어머님은 저를 판사를 시키고 싶어 하셨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엄마 걱정하지 마, 열심히 공부할게.’ 하면서는 돈만 생기면 집 앞 레코드사에 가서 판을 사 오곤 했어요. 그게 제게는 ‘판사’ 이였던 거죠. (웃음) 그러다 가세가 기울어 빚쟁이들에게 몰리게 되었고, 그렇게 한 3~4년 정도가 지나니 어머님이 많이 힘드셨나 봐요. 자살 시도를 하시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산 정상까지 쫓아가기도 하고, 어머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사법시험에 두 차례 응시했어요. 그 와중에 숙부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저희 집안의 비밀을 말씀하시더군요. 사실 전 작은집에서 큰아들로 태어났고, 지금 저를 키워주신 어머님은 큰어머님이셨던 거예요. 예전에는 아들이 없으면 작은집의 아들이 양자로 가게 되어있었거든요. 그런데 숙부님께서 하시는 말씀. “네 아버지(큰아버지)가 6.25 당시 돌아가실 때, 공산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셨다. 그래서 네 호적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다. 그러므로 공무원에 당연히 임용이 안 되고, 대기업에서도 안 뽑아 줄 거니까 사법시험에 도전하지 마.” 하시더군요. 연좌제에 걸린다는 거예요.

 

애초에 저는 큰아버지에게 호적을 옮긴 그 순간부터, 법적 무능력자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죠. 국가의 모든 자격에서 박탈된 상태이고, 우리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노동일이나 장사밖에 없는 거예요. 시험을 쳐 봤자, 물론 합격도 안 되겠지만, 어머님을 구할 수 없는 것이었죠. 그때 저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고, 나의 능력을 펼칠 수도 없는 세상이니까. 그 당시가 79년도, 스무 살. 결국, 그때 강물에 몸을 던져서 자살 시도를 했죠. 그런데 강물이 나를 밀쳐서 죽지도 못하게 하더군요. 수양버들 나뭇가지 끝에 발뒤꿈치가 걸렸던 거예요.

 

그때 정신이 들고 나서 하늘을 봤더니, 먹구름이 자욱한 그 하늘이 어찌나 높고 아름답게 보이던지요.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나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어요. 순간적으로 내가 왜 죽으려 했을까, 죽으려 했던 이 용기로 뭘 하든 다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두려움이 싹 사라지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 같은 것도 사라졌어요. ‘하늘이 왜 나를 살려 놓았을까, 충분히 죽을 수도 있었는데.’ 를 고민했죠. 하늘이 나를 세상에 내보낼 때는 어딘가 분명 내 재주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니, 임무를 다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말라는 뜻이겠구나. 그 길로 짐을 싸 들고 상경했죠.



홀로 상경하신 이후에도 한동안 많은 고생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어떤 일들이 있으셨나요? 그리고, 마침내 히트곡을 발표하시게 되시기까지는 어떤 바탕이 있었나요?


그때 제가 자리잡은 곳이 남산 기슭, 보성여자고등학교 근처였어요. 지금은 좋은 집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해방될 때 월남하신 분들이 거처할 곳 없어 천막을 치고 살았던 곳이에요. 제일 못 사는 달동네였죠. 5년이 넘는 시간 정말 밑바닥에서 온갖 고생을 했어요. 생활비가 없어서 5일 넘게 굶어 보기도 하고… 온갖 아르바이트나 잡일은 다 했죠. 맹독성 도료에 코피 흘리며 고생하던 목수 아르바이트도, 죽도록 뺨을 맞던 시멘트 공사 노동일도… 그러다가,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한 스탠드바의 쇼에서 MC를 맡게 된 거예요.

 

이 경험이, 지금 생각해 보면 현재의 이호섭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같아요. 눈높이를 낮추고 손님 바로 옆에서 귀하게 모시는 법을 직접 익힐 수 있었고, 이것이 이후 방송 활동에서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시청자를 대하는 법,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는 법과 일맥상통하더라고요. 그래서 장수 프로그램들을 할 수 있게 됐죠.

 

5년 넘는 시절을 고생하다가, 제가 문희옥 가수의 <팔도 사투리 디스코>를 발표하면서 ‘빵’ 터졌어요. 일주일에 백만 장이 팔리고 그랬으니까요. 이게 바탕이 되어 당시 트로트 가수왕이었던 주현미 씨가 찾아와 작품을 의뢰하지 않나, 주현미 씨와 쌍벽을 이루던 박남정 씨가 찾아오지를 않나.. 최고 인기 가수라는 사람들이 전부 저를 찾아오기 시작한 거예요. 엊그제 돈이 없어 보름달 빵을 훔쳐 먹을 고민하던 내가, 자고 일어나 보니까 대스타가 되어 있던 거죠. 지금 돌아보니 참 아련하네요. 세상일이란 게 참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웃음)




▲ 다양한 매스컴에 비춰지는 이호섭 동문의 모습(KBS '아침마당')



# 인간에 대한 세심한 관심으로 창작의 원동력을 얻다 


이호섭 동문은 예술가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로, ‘인간에 대한 관심을 꼽았다. 세심하고 애정 어린 눈길로 주변을 바라볼 때, 어김없이 그는 창작의 중요한 원동력을 얻곤 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을 그처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는 걸까?



선배님께서는 ‘주변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습관’이 창작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 준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건 정확히 어떤 뜻이며,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요? 또한, 그렇게 해서 탄생한 곡이 있을까요?


예술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적인 관찰력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작품이 우연에서 기인하고, 그 우연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관찰력이기 때문이에요. 저를 스타덤에 앉힌 작품인 <팔도 사투리 디스코> 도 우연히 쓰게 된 작품이에요. 당시에는 매일같이 기획사, 레코드사에 제 작품을 들고 아침마다 순례를 돌았어요. 나중에는 다들 귀찮아하며 책상에 두고 가라고 하는데, 그러면 안 볼 것 뻔히 알면서도 기대를 하고 작품을 두고 오곤 했어요. 제가 마산 출신이라 사투리를 쓰거든요. 어떤 사장님께 “다음 주 ‘몽(목)’ 요일에 다시 오겠습니다,” 하고 나오는데, 전라도 출신인 사장님께서 ‘몽요일’이라는 제 발음을 지적하며 놀리시더라고요. “몽요일, 몽요일...” 되뇌면서 오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 가요계에 팔도 사투리로 만든 노래가 아직 없는 거예요. 그 길로 교보문고에 가서 <한국 방언사전>이라는 책을 샀어요. 하루 내내 책을 보며 제일 재미있는 어휘들을 전부 옮겨 적었죠. 그렇게 스무 곡을 만든 거예요. ‘우짜 그라요.. 시방 나를 울려놓고...’ 그게 대박이 난 거죠.

 

<잠깐만> 같은 경우,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젊은 부부가 있었어요. 이때도 가사가 하나도 안 써져서 오늘은 한강변에 가서 써봐야겠다 하고 아침 일찍 나가는데, 옆집 새댁이 짐을 한가득 싸 들고나오는 거예요. 아침부터 남편이랑 싸우고 나오는 것 같았어요. 동네방네 들리게 시부모랑 남편 욕을 하면서 가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잠깐만 다시 생각해보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나온 게 <잠깐만>이에요. “만날 때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돌아설 때 아름다운 사랑이 되자” 이 가사도 그렇게 나온 거고요.

 

제 가치관은 내 노래에 다 담겨 있어요. 주변에서 아옹다옹, 오손도손 살아가는 여러 사람을 보고 나온 것이 제 노래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항상 만날 때, 좋을 때는 연인이든, 동업 관계이든 늘 잘해 보자, 잘 만났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헤어질 때는 증오하고 화를 내요. 그렇지만 헤어질 때도 늘 고마웠다는 이야기해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관계였든, 그 관계는 내게 분명 어떤 식으로든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을 테니까요. 좋은 사람도 자본이고, 나쁜 사람도 자본이에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런 마음들이 있으면 그것이 축이 되어 아름다운 세상이 되어가리라 생각해요.

 


선배님께서는 90년대 이후로는 대중문화 전반에 직접 나서기보다는 든든한 선배와 조력자의 역할을 해주고 계신 것 같아요. 선배님께서 바라보시는 현재 대한민국의 대중문화는 어느 위치에 와 있나요? 올바른 대중문화가 걸어야 할 길이란 무엇일까요?


95년도까지는 저를 대중문화의 ‘트렌드 리더’라고 할 수 있었죠, 그때는 대한민국 1, 2위 노래를 다 제 노래가 휩쓸었으니까요. (웃음) 그런데 지금은 방탄소년단이라든지, 아이돌의 노래들이 이끄는 세상이에요. 저는 변방에 나와 있지만,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연구자의 입장으로써 대중문화를 유의 깊게 바라보고 있어요.

 

간단히 말하자면, 결과가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대중문화로서 전 세계를 휘어잡는 것이 쉬운 일이냐는 거죠. 국가의 지도자가 어떤 나라를 10번을 다녀온다고 해서 한류가 생기겠는가, 아닙니다. 요즘은 문화의 시대에요. 그런 시대에 이런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인정받을 만한 질의 문화라는 뜻일 겁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 음악의 가사들 속에 보다 한국적인 것, 성찰적인 요소가 있었으면 하는 건 사실이에요. 대중가요란, 그 시대의 가장 대표되는 가치관과 세계관, 유행감각과 그 시대 숨결의 단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대중가요를 보면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거죠. 그 어떤 교육보다도 전 국민의 입에 어떤 메시지를 쉽게 맴돌 수 있게 하는 것이 노래니까요. 귀를 한번 거친 후 잊히는 노래가 아니라, 가슴을 울린 후에 눈물이든, 춤이든, 희열이든 어떠한 유의미한 발산을 이끌어낼 수 있는 노래가 더 유행했으면 좋겠어요. 고민이 없는 노래가 나오는 한, 대중문화 또한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 서강에서 새로운 꿈의 밑그림을 그리다 


50세가 넘은, 이미 성공한 작곡가의 돌연 대학원 입학. 그것도 학사 과정이 빡빡하기로 유명한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의 입학은 많은 사람에게 놀라움과 함께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50대의 나이로 대학원 입학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면에는 어떤 꿈이 있었던 걸까?

 


누구든 이미 충분히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동문님께서는 방송 활동을 지속하면서도 돌연 서강대학교 대학원에 지원, 입학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게 된 계기나 동기가 있을까요?


네, 저는 꿈이 있었거든요. 아직도 이루고 싶은 꿈이 정말 많아요. 최종적으로는 가요대학교를 설립하고 싶고요. 대중가요, 노래를 발전시키는 것이 국책 사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국민이 힘 안 들이고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 노래라고 생각하거든요. 심폐, 복근, 내장지방 제거에 골고루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노래예요. 정신 건강에도 좋으니까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는 거죠. 노인 분들과 전 국민의 건강을 위해 노래의 효과에 대해 더 과학적으로 규명해내고 싶어요. 지금은 의학계에 계시는 분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고, 어떤 노래를 불렀을 때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이 있는가에 대해 체계적으로 규명해낼 거예요. 그래서 이를 복지로 연결하고, 궁극적으로는 개개인 삶의 질과 만족도를 올리기 위한 방법을 고민할 거예요. 결국, 우리가 음악을 하든, 무엇을 하든 삶의 만족을 위한 것이니까요. 지금은 국문학과 인문학이 평가절하를 받고 있지만, 이건 근시안적인 시각 때문이거든요.

 

저는 인문학의 진짜 가치를 알고 있어서 국문과에 진학한 거죠. 다만 이걸 모두가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인간 삶의 기반이고, 진정한 학문적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예술과 인문학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 시켜 국민 삶의 질을 증진하고 싶어요. 지금은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몰라도 전, 이게 우리가 미래를 위해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해요.

 

대중작사가로 활동하는 이상 저는 평생 우리 국민들이 먹여 살리는 ‘머슴’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국민 한 분이 노래방에서 제 노래 한 곡을 부르더라도 다 그게 제게 도움이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국민들을 위해 뭘 해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꾸게 된 꿈이에요. 소중한 국민 여러분의 삶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도구가 바로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학교 중 특별히 서강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또, 박사 학위를 취득하신 지금 서강에서의 시간을 돌아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쉬운 길을 가고 싶지 않았어요. 저를 위한 또 하나의 시험, 도전의 기회라고 생각했거든요. 편안한 길을 갈 경우, ‘어영부영 하다가 나왔겠지’하는 주위의 평가를 받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왕이면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받는 서강대를 나와 ‘어, 좀 열심히 했겠네’ 하는 평가를 받고 싶었죠.

 

입학해 보니 참 난감하더군요. 어린 젊은이들과 공부를 해야 하는데, 저는 아버지 세대잖아요. 이호섭 내가 하는 행동과 언행이 어떻게 보면 부모님 세대를 대표하는 표본이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고, 욕되지 않아 보이도록 노력했어요. 젊은 친구들과 달리 머리가 굳어서 밤새 공부한 내용도 돌아서니 잊히고, 돌아서니 처음 보는 것 같더라고요. 온전히 자기와의 싸움이었죠. 그래도 두 배, 네 배 노력해서 매 학기 성적 장학생으로 졸업할 수 있었어요. 밤을 새서 공부하고 있으면 아내가 슬며시 들어와서 먹을 것을 놔두고 가요. 그러면서 뒤에 대고 한마디씩 해요. ‘아유 그냥 편하게 살지 늘그막에 뭔 고생이야..’ (웃음) 근데 저는 전혀 힘들지가 않았어요. 대학원에서 그동안의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정말 즐거웠던 기억만 남아 있어요. 그만큼 공부가 너무 즐거웠어요,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났으니까요.

 

서강대에서 가장 좋았던 건, 내가 연예인이라고 해서 특별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대우해 주었고, 특별히 잘해주는 것도 못 해주는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어요. 우리 대학원 동기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느 날은 한 친구가 다가와, 혹시 삼국유사 스터디에 참여할 생각이 있냐고 묻는 거예요. 저녁 시간에 사실 나는 제일 바쁜데, 그 초대가 정말 고마워서 일정을 다른 요일로 바꾸고 스터디에 참여했어요. 나를 끼워 주는 게 너무너무 고마웠어요. 나를 아빠 세대라고 따돌리지 않고, 허물없이 끼워 줬다는 것. 포용력이나 열린 마음을 어린 친구들에게 참 많이 배웠죠. 자녀 같은 동기들이 기꺼이, 제 동료가 돼 줘서 그들과 보냈던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이게 바로 서강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 서강대학교 2019.8.20 하계 대학원 학위수여 기념 사진 


마지막으로, 서강 동문과 후배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는가요?


자기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고 말하고 싶어요. 자기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을 욕되게 하지 않고, 모교를 욕보이지 않아요. 자기에게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럼으로써 자기 가치를 잘 발현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거예요. 아픈 상황, 척박한 상황에 놓인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 어렵고 험한 환경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나를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환경이라는 걸요. 조금만 버티면, 분명히 훨씬 밝은 나날이 올 거예요.

 

그저 히트곡을 많이 배출한 스타 작곡가라고만 생각했던 이호섭 동문은, 사실 마음속의 무한한 꿈으로 인해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다. 앞으로의 목표 이야기를 할 때 그의 얼굴에 떠오르던 환한 웃음을 기억하며, 세상이 무어라고 답하든 차근히 이뤄져 나갈 제 2의 인생을 서강가젯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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