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사람을 위하여 공인노무사회 회장 박영기 동문 (종교 89)
작성자 서강가젯(Sogang gazette)
작성일 2020.09.17 10:43:03
조회 1,944



      

 노무사란 노동과 관련된 법률 및 경영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직이다. 노동자의 권리구제 대리·대행, 기업의 인사노무관리 상담 및 컨설팅, 노사분쟁 중재와 노무관리진단…. 노동과 기업에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노무사의 업역이다. 노동의 체계와 의미를 바로 세우기 위해 분투하는 노무사들의 뒤에는 공인노무사회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 박영기 동문(종교 89)은 18년 경력의 노무사이자 현 공인노무사회 회장이다. 노동자와 노무사의 든든한 동반자인 그를 서강가젯이 만나보았다.



본 인터뷰는 2단계 사회적 거리두기가 적용되기 이전,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진행되었습니다.          


 # 노무사 박영기_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다.       



▲ 공인노무사회 회장 박영기 동문



 노무사는 전문직 중에서도 대중에게 상당히 친숙한 직종이다. JTBC 드라마 ‘송곳’, 영화 ‘카트’나 ‘또 하나의 약속’ 등에서 노무사들은 약자를 위해 노동현장을 뛰어다닌다. 당사자에게는 이런 이미지가 어떻게 느껴질까. 조심스럽게 묻자 박영기 동문은 활짝 웃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무사들이 더 노력해야죠. 실제로 노무사 중에는 평생을 노동자와 노동조합, 비정규직, 자영업자와 영세 사업주를 위해 일하는 분이 많습니다.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 이런 분들의 삶이 조금 더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박영기 동문은 노무사란 ‘헌신하는 직업’이라고 재차 강조하며, JTBC 드라마의 원작이 된 최규석 작가의 만화 ‘송곳’을 추천하기도 했다. 직업에 대한 만족감과 충만함으로 가득 찬 박영기 동문. 그가 걸어온 노무사의 길이 궁금했다.


반갑습니다 동문님.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네, 안녕하세요. 종교학과 89학번 박영기입니다. 저는 2002년 노무사 시험 합격을 시작으로 올해 18년째 활동 중인 노무사고요.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조직국장, 노무법인 ‘사람’ 대표, 공인노무사회 사무총장 등 노동과 관련된 직책을 꾸준히 맡다가 2017년부터 한국공인노무사회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노무사라는 직업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노동권과 노동 현장에 꾸준히 관심이 있었습니다. 졸업 이후 1996년 신한생명에 취업했는데, 취업 직후 IMF가 일어났어요. 구조조정과 이직을 겪다 보니 많은 것이 변해 있더라고요. 그래서 99년 5월에 사표를 냈습니다. 회사 내에서 제가 가진 역량, 사회적인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꿈꾸던 노동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퇴사 이후 노무사 시험과 노동조합 활동을 병행했습니다. 신한에서부터 몸담고 있던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활동이었죠. 파업, 집회 현장에도 나가 보고. 그런 경험을 거치면서 제가 하고자 했던 노무사의 길, 노동을 위한 길이 더욱 뚜렷해진 것 같아요. (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이후에도 바로 개업한 게 아니라 노동 현장에 머무르면서 많이 배웠고요.
 실질적인 노무사 활동은 여의도에 노무법인 ‘사람’을 설립하며 시작한 셈이에요. 노무법인은 거의 고용노동부, 한국근로공단 등 노동행정관청 주변에 자리합니다. 그런데 저는 첫 직장이 금융회사였고, 공인노무사 합격 이후로는 사무금융연맹에서 일하다 보니 금융기관, 외국계 회사의 노무사건을 많이 맡았어요. 그러다 보니 여의도에 거의 최초로 노무법인을 냈고, 지금까지도 주변 금융권 사무직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활발하게 자문하고 있습니다.


노무사로 일하시면서 다양한 사건을 담당하셨을 텐데요,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들이 있으실까요?


 기억에 남는 사건은 매우 많습니다. 일단 노무법인 개업 초기 일본계 반도체 회사에서 벌어진 정리해고 싸움을 꼽을 수 있겠는데요. 당시 제조업 현장에서 정말 이상한 제도가 운영되었습니다. 승진하면 사무직 과장이 되는데 과장이 되면 정리해고를 통해 회사를 그만두게 하는, 승진 자체가 공포인 제도였어요. 노동위원회를 거쳐 (노동자 측이) 결국 승소했고, 30여 명의 노동자가 복직에 성공했죠. 결국 합의금을 받고 퇴사했지만요. 승소한 기쁨뿐만 아니라 노무법인 운영에 재정적으로 도움까지 되어,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사건이에요.
 드라마 ‘송곳’과 비슷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한 사업장에서의 정리해고 투쟁이었는데요, 노동조합 위원장을 비롯해 많은 조합원이 일방적으로 정리해고를 당한 사건이었어요. 그때 회사에서 조합원들에게 퇴사 압박을 무리하게 넣었는데, 주로 사무직을 맡던 강성 조합원을 현장, 매장 관리직으로 이직시키는 방식이었어요. 결국 조합원을 모두 복직시키는 대신, 노동조합 위원장 한 명이 책임지고 회사를 떠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마음 아픈 사건이었지요.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현재 그 노조위원장이 민주노총 주요 연맹 중 하나인 서비스연맹에서 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점이에요. 아주 충실하게 역할을 다하고 있어서 마음이 놓입니다.


노무사라는 직업 특성상 힘들기도 하지만 보람이 정말 크시겠어요.


 네, 저는 노무사가 천직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노무사는 이름 그대로 노동자와 회사 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사람입니다. 회사 측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주로 노동조합, 노동자 쪽을 주로 대리하고 자문해 왔어요. 보람찬 시간이 정말 많았습니다. 일에 보람만 느껴도 행복한데, 사회·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입지까지 다져졌으니. 이래저래 참 감사하고 뿌듯한 직업이죠.
 (노무사)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여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민주노총에서 첫 월급을 탔는데 아마 80(만원)도 안 됐을 거예요. 아내가 많이 고생했죠(웃음). 그래도 그 시작점에서 뒷걸음치지는 않았으니까요. 즐겁게, 보람차게 일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법률대리뿐만 아니라 경영 상담·자문 역시 노무사의 중요한 업무예요. 그런데 기구들이 제 자문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있어요. 정도(正道)를 걷는 게 손해라고 느껴졌는지. 그런데 전문가의 역할은 그런 거잖아요.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당장은 손해가 되더라도 올바른, 발전적인 길을 제시하는 것. 노무사로서 기꺼이 그런 주장을 하고 또한 인정받을 때 정말 뿌듯합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거니까요.
 노무사는 자기의 영리, 안위만을 생각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닙니다. 노력에 비해서는 보수가 적다고 느끼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그러나 그 이상의 원동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서로 도와가는 과정이 힘이 되고 보람이 되죠. 일하면서 그런 것들을 느끼는 분은 행복한 노무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제17대, 18대 공인노무사회 회장을 연임하셨습니다. 임기 중 여러 활동을 진행하셨어요.


 네. 공인노무사회는 노무사의 권익을 보호하고 업무 역량을 높이기 위해 설립된 단체입니다. 노무사 권익 신장, 제도 개선, 공인노무사법·노동관계법 보완 등 노무사회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첫 번째 임기엔 세 가지 공약을 걸었습니다. 첫째는 공인노무사회 사옥을 마련하겠다. 노무사회를 설립한 지 올해로 35년째인데 여태 독립적인 사옥이 없었어요. 그래서 작년 8월에 당산역에 건물을 매입해, 회관을 마련했지요. 둘째는 공인노무사법을 개정하겠다. 공인노무사회의 숙원사업이기도 했는데요, 업역 확대, 업역 보호, 회원 등록업무 자체 수행 등의 사항을 보장받았죠. 업무영역 확장은 고무적인 지점인데요. 이전까지 노무사들은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 고용노동부 소관의 사회보험만 담당할 수 있었어요.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과 관련된 사건은 담당하지 못했고요. 그런데 그 업역을 사회보험관계법령 전체로 확대한 거죠. 셋째는 고용노동부와의 관계를 개선하겠다. 공무원 출신과 전문직 출신이 엇비슷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른 전문직종과 달리, 공인노무사는 초창기부터 노무사시험(CPLA) 합격자들이 조직 중심에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공무원, 노동부와 갈등을 겪기도 했죠. 사무총장에 있을 때부터 그 문제를 개선하고 싶었고, 회장직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해결에 들어갔어요. 노무사회 집행부 상근부회장으로 고용노동부 1급 출신 공무원을 선임하며, 고용노동부 공무원과 노무사의 협력을 위해 노력했죠.


▲ 당산에 자리한 한국공인노무사회 회관



 # 서강인 박영기_인문학적 시각으로 ‘남을 위한 삶’을 실천하다.       



▲ (좌)사무실 앞의 박영기 동문 (우)한국공인노무사회 현판



 박영기 동문이 설립한 노무법인 ‘사람’. 그 이름에는 인간을 향한 애정이 묻어난다. 지치지 않을 다정, 인본주의적 시각이 만들어지는 데엔 서강에서 보낸 시간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서강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박영기 동문은 89학번 홈커밍 준비위원장을 맡으며, 그 마음을 아낌없이 실천하고 있다. 박영기 동문에게 서강은 어떤 시절이었을까.


서강에서 기른 인문학적 소양이 동문님께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기억에 남는 활동이나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신부가 되고 싶어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 진학했고, 철학을 복수전공했습니다. 전문직업인을 택하며 삶의 방식은 바뀌었지만 서강에서의 시간은 언제나 제 바탕에 있었습니다. 공인노무사 생활에 기초가 된 것은 종교와 철학이라는 인문학 공부와 학생운동이라는 실천이었지요. 제 직업과 학창 시절을 이어주는 공통점은 늘 사람,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으니까요. 노무사 시험에서는 경영학, 경제학, 법학을 묻지만 결국 업의 핵심은 사람 관계의 문제를 푸는 것이지요. 그걸 위해 가장 필요한 공부가 인문학이고요.
 저는 서강에서 ‘타인을 위한 삶’을 배우고 직업 현장에서 그걸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인문학이라는 소중한 관점과 사람 사랑에 대한 실천을 가르쳐 준 서강대학교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요.


89학번 홈커밍 준비위원장을 맡으셨어요. 홈커밍 행사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홈커밍은 이름 그대로 각 학번의 졸업생들이 공동의 집, 서강대학교에 모이는 행사예요. 졸업 3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되지요. 올해는 90학번 홈커밍이 열릴 거고요. 서강이 제게 준 은혜를 일부나마 갚고 싶은 마음에 기꺼이 준비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작년 30주년 홈커밍데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봉사하고 헌신한 부위원장과 준비위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준 89 동문들에게 감사 인사 드리고 싶네요.
 대학을 졸업하고 30년쯤 지나면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기둥으로서, 입지를 다질 나이라고 이야기하죠. 각자의 자리에서 우뚝 서 있는 서강 동문들을 만나고, 반가운 이야기도 주고받고, 학창 시절의 추억도 나누는 즐거운 시간입니다. 20년 뒤, 졸업 50주년에 꼭 다시 만나자 하며 자리를 마무리했어요.
 홈커밍에서는 후배들을 위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합니다. 작년 89학번 홈커밍에서는 장학금과 학교발전기금을 마련했는데, 발전기금은 올해 본관 엘리베이터 설치에 사용되었어요. 마련한 입장에서도 굉장히 뿌듯했습니다.


90홈커밍데이 홈페이지 바로가기 (클릭)


동문님들의 관심과 지원으로 서강은 점점 성장하고 있습니다. 서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시나요?


 우리 서강은 작고 강한 대학입니다. 외형보다는 내실을 기르는 배움터지요. 제가 인문학을 전공해서 더 그렇겠지만, 기술보다는 사람을, 처세보다는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술과 처세는 사회에 나오면 빠르고 쉽게 배우는 것 같습니다.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진리의 상아탑으로 남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서강을 더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고, 서강은 우리에게 더 큰 자랑으로 다가오겠지요.


 # 앞으로의 박영기_급변하는 물살 속 인간의 자리를 고민하다       



▲ 공인노무사회관 현판 앞의 박영기 동문



 세계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한다. 기술과 환경의 변화는 노동 현장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4차 산업혁명으로 많은 직군이 대체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고, 코로나 19로 인해 이전에는 상상에 그치던 유연근무, 재택근무가 본격 도입되었다. 현장의 변화는 노동을 다루는 노무사에게도 민감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박영기 동문은 “노동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라며, 변화의 물살을 지혜롭게 수용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 현장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노무사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네. 노동의 형태가 급변하고 있죠. 일할 수 있는 시간과 역량은 늘어났는데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희미해지고요. 오래도록 인간답게 지낼 방법, 다양한 분야에서 즐겁게 노동을 이어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육 시스템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인노무사회에서 교육부와 함께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특성화 고등학교 맞춤형 사업을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특성화고) 학생들의 현장 실습 컨설팅, 실습 현장 안전관리, 노동관계에 관련된 것들을 자문·점검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안전사고를 방지하고 학생들이 좋은 환경에서, 존중받으며 진로를 탐색하도록 돕기 위함이지요. 현재는 전국 특성화고에 전담노무사를 배치해 관리하는 사업까지도 진행 중입니다.
 코로나19로 노동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죠. 그래서 실업급여, 재난소득, 고용안정자금 등 국가적 조치가 운영되고요. 그러한 고용·노동지원 역시 노무사의 역할입니다. 공인노무사회에서 3월부터 6월까지 코로나19 상담센터를 운영했어요. 고용노동부 고용상담센터의 업무를 분담해서, 부당해고, 무단급휴직, 고용안정지원금과 관련된 상담을 진행했죠. 노무사로서 노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노동의 미래, 노무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자본 아닌 것으로 자본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예요. 노무사는 그런 노동을, 사람을 중심으로 사는 일이고요. 그러니 노무사는 인간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도움을 줄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요.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진단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밀고 끌어 주는. 그게 전부 노무사의 일이니까요.
 4차 산업혁명이 노동의 소외를 불러올 것이다, 많이들 걱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노동에, 인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봐요. 인간이 있는 한 노동은 사라질 수 없고, 우리는 다만 더 좋은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해 고민해야겠죠.
 4차 산업혁명은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변화시킬 겁니다. 특히 코로나19 위기 이후 더욱 가속화 할 것으로 보이고요. 인공지능, 빅데이터가 많은 것을 대체하겠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남을 겁니다. 노무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자격사입니다. 그러니 인류가 존재하는 한, 갈등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지막까지 남을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서강대의 교훈처럼 ‘남을 위한 삶’을 고민하는, 사람 향기 가득한 전문자격사가 될 수 있도록 한국공인노무사회 회장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터뷰 내내 박영기 동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행복하다고 느끼시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동문은 한 구절을 인용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선종하시기 전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 저는 제 삶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제 전문성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벅차게 기쁩니다.”
박영기 동문은 일에 대한 만족감,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강인하게 서 있는 어른이었다. 그가 딛고 선 땅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굳센 터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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