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대한민국을 전하다, 김용래 연합뉴스 기자 (영문 98)
작성자 서강가젯(Sogang gazette)
작성일 2019.01.29 14: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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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파리 주재기자, 김용래 동문 (영문 98)


일제강점기 미국, 중국, 러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발굴한 기자가 있다. 이 기자는 김용래 동문으로, 기사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관훈언론상(국제보도부문)을 수상했다. 관훈언론상은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언론상 중 하나로, 특히 국제부문의 경우에는 최병우기자기념국제보도상을 겸한다. 이번 서강가젯에서는 김용래 동문을 만나 프랑스 내 독립운동사를 발견하게 된 계기와 취재 과정, 기자로서의 삶과 가치관에 대해 들어보기로 한다.



관훈언론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김 동문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분들을 기억할 수 있게 됐습니다. 프랑스 내 독립운동사를 취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김 동문 : 제가 파리특파원에 부임한 게 2017년 1월이고, 프랑스의 한국학자들이 모여 한국독립운동사를 공부하는 학술단체의 결성 소식을 보도한 것이 그해 12월이었어요. 이 기사가 관훈언론상 국제보도부문을 수상한 '프랑스 내 한국독립운동사 재발견' 연속기사의 시작이에요. 이 기사를 쓸 때는 제가 계속해서 연속보도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보통 기자의 취재는 내가 '이런 걸 써야겠다'는 치밀한 계획으로 시작되기도 하지만, 운이 맞아 우연히 시작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에 아는 분이 제 아내를 통해 "이런 분이 계신데 한번 만나보고 얘기 나눠보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파리에서 연구년을 지내시던 독립운동사 전공 교수님을 한 분 알게 됐고, 그 인연으로 다른 프랑스인과 한국인 학자 분들을 더 알게 됐습니다. 이분들과 자주 교류하면서 깊은 신뢰관계가 쌓였고, 틈틈이 독립운동사 기사를 썼습니다.


또 결정적인 시점에 프랑스 지방에 거주하는 동포 선생님 부부의 제보를 입수해서 잊혀진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상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작년 내내 독립운동사 관련 기사들을 연속해서 발굴해서 썼는데, 마침 올해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것이 제 기사의 파급력을 더 높이는 효과가 있었어요. 작년 10월 문재인 대통령이 방불해 동포간담회에서 제 기사를 언급한 것도 기사의 영향력을 크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왼)재불 독립운동가 홍재하의 차남 장자크 홍푸안, 재불 사학자 이장규, 김용래 동문 

(오)재불한인 1세대가 참여한 프랑스 쉬프 1차대전 전사자 묘지 - 이곳에서는 1920년 3월 1일 삼일운동 일주년 기념식도 열렸다



해외에서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라 사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기사를 완성하기까지 꽤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취재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나요?


김 동문 : 기자의 취재는 보통 대인 취재와 자료 조사, 크게 두 줄기라고 할 수 있어요. 저 같은 경우 이 분야에 노하우가 풍부하신 교수님들과 연구자들과 평소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는데, 이분들이 새로운 사료를 발견하거나 하시면 제게 연락을 주실 때가 많았어요. 또 제가 관련 문헌을 뒤지거나 제보를 통해 좋은 정보를 얻게 되면 제가 신뢰하는 학자분들께 저의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죠. 이분들과 연구 및 취재상황을 공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독립운동사 논문이나 기사 등 문헌도 틈틈이 찾아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분야의 기사를 쓰려면 해당 기자가 기존에 습득해놓은 지식이 다양하고 체계적일수록 기사 작성이 수월해지거든요.



특파원으로 프랑스에서 글을 쓰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문님의 기사를 통해 프랑스 사회를 이해하고 판단합니다. 그 나라에 대한 여론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는데, 기사를 쓸 때 스스로 준수하려는 기준이나 가치가 있을까요?


김 동문 : 프랑스라는 나라를 보는 한국 사회의 기준은 두 가지로 정형화된 것 같아요. 예술을 사랑하는 자유/평등/박애의 나라라는 낭만적 인식이 한 편에 있고, 폭력 시위가 난무하고 시대적 흐름에 따른 변화를 거부하는 고집 센 나라라는 인식이 다른 한쪽에 있죠.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시는 분들도 물론 있지만, 프랑스에서 오래 거주하거나 공부하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 단편적인 정보만을 갖고 섣불리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프랑스는 아직까지는 국제적인 측면에서나 문화/역사적인 측면에서나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저는 프랑스를 다루는 기사를 쓸 때 사안의 다양한 면을 고려하려고 해요. 독자들이 단편적인 면만 갖고서 성급히 판단해 버리지 않도록 말이죠. 가령 이런 게 있어요.


프랑스는 평등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해요. 전국의 국립대가 평준화돼있고 대학(국립대)이 사실상 무상 교육이라 매우 평등해 보이지만, 그랑제콜이라는 철저한 엘리트 교육 시스템이 구축된 나라에요. 사회 자체도 극소수의 엘리트 계층이 이끌어가고 있어요. 또 박애를 강조하지만, 강고한 식민주의의 흐름이 있기도 하고요. 한 나라를 하나의 인상이나 기준으로 재단해버리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을 하나의 이미지로 소비하는 것이 위험한 것처럼요. 저는 사안의 역사적 맥락을 중시하고, 다양한 견해와 시각으로 이끄는 보도를 지향하는데 그것이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특파원이라는 직책은 다른 기자들에 비해 알려진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기자 개인의 자율성이 클 것 같은데, 특파원으로서의 삶은 어떤가요?


김 동문 : 몸은 파리에 있지만 일하는 스타일과 형식은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특파원이라는 명칭이 '특별히 파견된 인원'이라는 뜻인데, 사실 저는 이런 호칭이 좀 거북하고 부담스러워요. 이 역시 일본의 잔재로 알고 있어요. 일본 언론도 ‘特派員 (とくはいん)’ 이라고 하거든요. 프랑스도 특파원을 '특별히 보냈다'는 뜻의 ‘envoyé spécial’ 을 ‘correspondant (주재기자)’과 병용하니까 우리만 그렇게 하는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특파원' 호칭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절 '언론사가 외국에 특별히 파견한 취재기자'라는 좀 우쭐해 하는 뜻이 담겨 있을 거예요. 저는 그냥 '주재기자'라는 표현이 중립적이고 본질에 더 맞는 명칭이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파리에 있으나 서울에 있으나 취재하고 기사 쓰는 기자의 일은 다르지 않아요. 제 경우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모나코가 관할 지역이고 영국과 아일랜드도 런던 특파원이 공석 시 제가 커버하기 때문에 커버리지가 좀 넓지요. 통신기자의 특성상 매일 일정량 이상의 다작(多作)을 해야 하는 것도 있고, 저 혼자 이 광대한 영역을 전부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죠. 따라서 기본적인 소재는 외신을 보며 찾고 있어요. 프랑스가 저의 주 취재대상이므로, 불어로 된 현지 신문들을 몇 개 구독하고, 영자신문과 잡지도 구독해 훑어보는 게 중요 일과입니다. 특파원은 주재국의 언어를 잘하면 잘할수록 좋아요. 영어는 기본으로 해야 하고요. 그렇다고 제가 두 언어를 잘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사실 불어는 성인이 되어서 배운 언어이고 연수를 한 것도 아니라서 지금도 힘들지만, 일하는 데 큰 불편은 없어요. 외국어 실력도 중요하지만 결국 언론사의 특파원도 한국어로 기사를 쓰는 일이므로 취재력과 기사 작성능력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김 동문의 모습


동문님의 학부생 시절이 궁금합니다. 글쓰기를 좋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떤 학생이셨나요? 원래부터 기자라는 직업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김 동문 : 책과 외국어, 역사, 미술, 체육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지만 어느 것 하나 아주 뛰어나게 잘하는 것 없는 학생이었습니다. 영문과 문학학회 '현실과 창작'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함께 시와 소설을 읽고 토론하고, 방학 때는 합숙 세미나도 하고 창작물을 놓고 서로 비평하는 합평회라는 것도 했지요. 기본적으로 저는 학부 시절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학교 다닐 때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외국 문학을 학문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그런데 군 제대하고 공부를 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하니 두렵더군요. 문학, 역사, 예술, 정치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서 한 분야를 깊이 파지 못하는 제 성격을 잘 아니까요. 그래서 찾아보니 기자가 여러모로 적당하겠더라고요. 4학년에 올라가면서 방황을 끝내고 언론사 입사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게 됐어요.

               


기억 속 서강대학교는 어떤 모습인가요?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점을 하나 뽑아본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김 동문 :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름답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고 그렇죠. 서강대 재학시절 학업성적이 좋지는 않았지만, 문과대와 사회과학대를 오가면서 제 관심 분야의 다양한 양질의 수업을 들었던 게 지금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제 세계관을 넓고 깊게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서강에는 똑똑하고 재미있는 그래서 배울 점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과 교수님들이 참 많았어요. 그런 집단에 속하고 또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발전의 가능성이 크죠. 그리고, 모국어인 한국어는 물론 영어와 불어, 한문 등 언어와 글에 대한 능력을 서강의 독특한 교육시스템을 통해 다질 수 있었어요. (요즘도 제가 받던 독후감과 교양국어 교육이 계속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문님의 기사를 통해 우리는 재불 독립운동가 홍재하, 황기환을 기억할 수 있게 됐고, 여전히 남아 그들의 역사를 연구하는 교수와 학자들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이런 부분이 기록매체로서 기사가 갖는 가치가 아닐까 싶은데요, 앞으로 쓰고 싶은 기사는 어떤 기사인가요?


김 동문 : 파리특파원으로서의 임기가 이제 1년 남았는데, 있는 동안 프랑스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성과와 흐름을 계속해서 소개하는 것이 제 의무같이 느껴집니다. 기대하지 않은 상까지 받았으니 더더욱 그렇고요. 아직도 써야 할 얘기들이 많이 남아 있어요. 또 유럽에 진출한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찾아내 그들의 삶과 예술의 이야기를 와이드 인터뷰로 소개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특파원에 부임한 후에 제가 인터뷰해서 이름을 알린 젊은 예술가들이 좀 있었어요. 숨은 진주 같은 분들이고, 저보다 한참 어리더라도 인터뷰를 해보면 배울 점들이 많은 분들이었어요. 훌륭하지만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의 젊은 예술가들을 찾아서 세상에 알리는 일은 참 가치가 있는 일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임기 3년 차인 올해 그가 프랑스와 유럽을 어떻게 이끌지, 세계적으로 강력한 포퓰리즘의 열풍에 어떻게 대처할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부분도 열심히 공부하고 관찰해서 역사적 맥락을 짚고 미래를 지향하는 그런 기사들을 쓰고 싶습니다.

 

김용래 동문의 기사가 아니었다면, 많은 이들은 이역만리 먼 타국땅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외치던 이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술의 고장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 한국인 예술가들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자는 그가 쓰는 기사로 자신을 말한다. 주목받지 못한 것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엇나간 시선을 바로잡는 김 동문은 오늘도 꾸준히 그 자리에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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