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이 박찬욱과 함께였던 시간, 박찬욱(철학, 신방 82) 인터뷰
작성자 서강가젯(Sogang gazette)
작성일 2021.11.01 10:41:35
조회 2,224



  

 "전환이라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도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철학과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던 제가 엉뚱하게 영화감독이 된 것처럼 말이죠." [아가씨], [올드보이]를 연출한 영화감독 박찬욱이 [서강 더 엑셀런스] 홍보 영상 촬영을 위해 학교를 찾아 서강에서 보낸 시간을 들려줬다.

  

  

 거장의 젊은 시절을 찾아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과연 대학 시절부터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챘을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위에서 어떤 걸음을 내디뎠는지 대학생의 관점에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바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서강대가 제작 중인 [서강 더 엑셀런스] 홍보영상 촬영 덕분이었다. 여러 동문이 오랜만에 학교를 찾아 서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역시 오랜만에 학교를 찾았다. 그 생생한 현장을 그대로 전한다. 아, 마지막 질문으로는 영화인들을 꿈꾸는 서강인을 위한 조언을 부탁드렸다.

  

  

  

  

서강대학교의 첫인상이 궁금합니다.


 아버지가 건축을 전공하셔서 그런지 건축에 관심이 있었어요. 김중업 선생님이 설계하신 본관이 제 눈에 먼저 띄었습니다. 아담하고 수수하면서도 우아한 비례를 가지고 있는 건물의 외관, 그리고 내부의 복도나 계단에서 볼 수 있는 편안하면서도 품위 있는 디자인에 우선 매료되었습니다. 그게 서강대학에 대한 저의 첫인상인데, 아주 좋은 인상이었죠.

  

  


▲ 서강대학교 본관 내/외부 전경

  

  

  

학교 다니시면서 특별하게 생각나는 것이나 에피소드들이 있으셨을까요?


 82년부터 시작된 대학 생활이라는 건 시대 분위기 때문에 생각나는 건 데모 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학교 안에 부대 단위로 경찰이 상주하고 있던 때였어요. 시위, 그리고 구호를 외치고, 최루탄이 터지고, 몸싸움을 벌이고 그런 것들이 일상이었거든요. 그래서 얻은 것이 있고, 잃은 것이 있죠. 얻은 것이라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역사와 나라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약자와 연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 공동체를 많이 의식하게 되고 그런 면이 있는가 하면 평화로운 그리고 아름다운 그런 청춘을 잃어버렸죠. 젊은이들은 어떻게든 또 어울려서 놀고, 즐기고 할 거리를 찾아내는 것이 속성이라 그런 일을 아주 못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과는 (분위기가) 매우 달랐습니다.

  

  

  

전공, 그리고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어떠셨나요?


 제가 철학과를 지망했던 것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막연히 미술비평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미술이론과 그 바탕이 되는 예술철학이랄까, 미학 이런 것을 공부할 수 있겠거니 하고 들어왔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서강대의 철학과는 당시에는 영미 분석철학이 지배 사조였어요. 아니면, 신부님들이 가르치시는 교부철학이나 중세철학 같은 가톨릭 철학. 이 두 가지가 주류였기 때문에 좀 당황도 했죠. 제가 배우고 싶은 강좌가 거의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훌륭한 선생들은 많이 계셨어요. 공부밖에 모르는 이한조 선생님도 계셨고, 아주 호탕하고 너그러우신 김태권 신부님도 계셨고. 그리고 학생들을 잘 이끌어주시던 엄정식 선생님도 계셨고. 그분들의 학자적 태도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철학을 제가 그렇게 막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은 아니었는데 적어도 철학 하는 태도-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태도. 어떤 문제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피상적으로 건드리고 마는 게 아니라 깊이 파고들어 가야 한다. 그 근본까지 의문이 남지 않도록 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던 건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박찬욱 감독

  

  

  

이렇게 들어보면 영화감독이 되신 게 동떨어진 일로 보이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고등학교 때도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는데 영화과를 갈 용기가 없었던 거죠. 지금도 젊은 분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는데 그때는 영화 일을 한다는 것은 뭔가 좀 특별한 사람, 특별하게 리더십도 있고 카리스마도 강하고 남들하고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러 가지 갈등도 잘 조정하고 그런 강인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저는 왜인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나처럼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이 할 일은 아니라고 일찌감치 포기했고,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철학과를 온 거였어요.


 그러나 역시 소망이라는 게 쉽게 포기되지 않는 거잖아요. 그래서 서광회라는 사진 동아리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었고 그렇게 조금씩 영화에 접근해 간 거죠. 그러다 서강대 도서관에 유난히 영화 관련 원서가 많았어요. 그 당시에는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영화 도서가 거의 없었는데, 서강대는 커뮤니케이션 센터 덕분인지 영화 관련 좋은 책이 많은 학교였어요.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그리고 그 책들을 빌려 읽기 위해서 서강대로 모인 학생들이 많았거든요. 그렇게 영화를 학구적으로 공부하기 좋아하는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차츰 이쪽으로 다가가게 되었죠. 그러다 그 당시 전국적으로 영화동아리가 창설되던 시기에 선배와 친구들과 함께 영화 동아리(서강영화공동체)를 만든 것이 시작입니다.

  

  

  

감독님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이 있으시잖아요. 서강에서 받은 영향이 있으실까요?


 제가 다른 대학을 갔거나 대학을 안 다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지금 같은 일을 하고 있을지 상상은 해볼 수는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일이죠. 아마 제가 적성에 잘 맞고 제가 원하는 강좌가 자주 개설되는 어느 대학교, 어느 과에 갔다면 그 공부에 취미를 붙여서 미술비평이나 예술철학 쪽을 전공하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이쪽으로 왔을 것 같고요.


 그런 면에 있어서 서강 대학의 분위기는 저에게 자주적인, 주체적인, 독립적인, 왜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서강 졸업생들은 밖에 나가서 티 내고 뭉치고 패거리 짓는 거 싫어한다. 그런 식의 인디 정신이 확실히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자부심, 구체적으로는 인문학 중시 분위기. 고등학생이냐는 놀림을 받아 가면서도 고전 공부, 독후감 쓰는 신입생 시절에는 의무 과목이 있었는데 그때 읽은 고전들이 자양이 되었고, 그렇습니다.

  

  

  

지금의 서강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요즘 젊은이들이 살아가기 힘든 시대라고 하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많이 미안하고 이런 사회를 물려주게 되어서 참 볼 낯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나름대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진 생각은, 어떠한 일을 하든지 간에 남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무작정 쫓아가지 않는 것이 자기의 정신건강에도 좋고 실리적으로 따져봐도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돈을 많이 버는 것이든, 무엇이든 어떤 꿈을 꿔도 좋지만, 그것이 정말 나에게 절실한 것인지 본질적으로 나에게 최고의 가치인지 따져보는 습관을 가지시기를 권하고 싶어요.

  

  

  

서강대학교가 어떤 대학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대학이 취업 아카데미처럼 되어가고 있다고 개탄하잖아요. 그게 어쩔 수 없는 추세라고 들었는데 거슬러 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희 같은 사람이 믿기에는 인문 교양이라는 것은 실용적으로도 굉장히 쓸모있는 것이고, 배우고 익혀두면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지식이 아니라 살아가는 태도, 사고방식을 배우는 일이기 때문에 적어도 예수회 학교인 서강대학은 그러한 가치를 저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화인을 꿈꾸는 서강인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대학을 다니던 때는 영화 책도 없고, 장비도 없고, 1분짜리 영화를 찍으려 해도 돈이 몇십만 원, 지금으로는 몇백만 원이 필요해서 엄두를 내기 어려웠어요. 근데 지금은 책도 많고 유튜브로 뭐든지 배울 수 있고, 스마트폰으로도 훌륭한 화질의 영상을 만들 수 있어요. 저도 스마트폰 영화를 찍었고 이번에도 또 스마트폰으로 단편 영화를 찍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젊은이들은 기회가 없다, 내가 영화과를 안 다니니까 어디서 배울 데도 없고, 돈도 없고, 영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라는 핑계가 더 이상 안 통하는 시대가 됐어요. 누군가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해요. 자기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1분 2분짜리라도 거기에 걸맞은 이야기를 만들어서 또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도 있고, 뭐든 할 수 있잖아요. 핑계가 없는 시대에 핑계 대지 말고 뭐든 나가서 찍자.


 그리고 꼭 장편 극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컴퓨터 앞에서 쓰자. 그리고 그게 잘 안 써지고 막힐 때 포기하지 말자. 처음에 잘 안 써지죠, 당연히. 100분짜리 시나리오를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럼 안 써지면 안 써진 대로 남의 영화를 베껴서라도 그 장면을 넘기고, 넘겨서 일단 끝까지 가보는 게 제일 중요해요. 마지막까지 써보는 거죠. 그럼 자신감이 생기고 그걸 남에게 읽혀야 해요. 자기 혼자 갖고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읽혀서 욕도 먹고 조롱도 당하면서 그러면서 발전하는 겁니다. 해야지 생각만 하고 불평만 해서는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시대에서 위기와 기회를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이 답변이 이 시대에 충분한 답은 아니라고 느낄 수도 있다. 요즘 시대에 영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기술이나 지식의 부족은 아닐 것이다. 도리어 시간과 집중력의 한계, 혹은 인문교양이라는 가치를 저버리는 마음이나 남들의 가치를 쫓아가야 한다는 부담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망은 쉽게 포기되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는 결국 핑계를 대지 말고 무엇이든 하며 우리 시대를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번 인터뷰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매우 유효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자신만의 가치를 고민하는 시간과 자양분을 쌓는 노력은 결국 나중에 돌아봤을 때 실리적으로도,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자신만의 이상을 꿈꾸며 불확실성을 마주하는 서강인에게, 한 시대를 멋지게 풍미하는 선배의 이야기가 한 줄기 빛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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