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경계를 허물다,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작성자 서강뉴스Weekly
작성일 2017.10.24 10:59:47
조회 2,558

역사의 경계를 허물다,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지난 8월, 본교의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소장 임지현 사학과 교수)가 세계 최대 규모의 인문학 연구소 네트워크인 인문학연구소 컨소시엄(CHCI)에 최초로 가입하는 성과를 내었다. 서강소식 Weekly에서는 임지현 교수를 만나 가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대안적 역사관인 ‘세계 역사(Global History)’를 알아보았다.



 국제학술교류를 굉장히 활발하게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얼마 전엔 소장을 맡고 계신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이하 CGSI)가 인문학연구소 컨소시엄(CHCI)에 한국 최초로 가입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학술활동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인문학연구소 컨소시엄(Consortium of Humanities Centers and Institutes, 이하 CHCI)에는 일본만 해도 도쿄와 교토에 있는 대학 연구소 두 군데 정도가 가입해 있고, 대만에서도 한 군데 회원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한 군데도 없었어요. 이때 초청을 받은 것이고, CGSI가 우리나라에선 최초로 회원이 된 것이지요.

 이외엔 NOGWHISTO(Network of Global and World History Organizations)의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세계 역사를 연구하는 전 세계의 학회들이 대륙 별로 조직되어 있어요. 유럽 네트워크, 아시아 네트워크, 미국 네트워크 이런 식이지요. 각 대륙 네트워크 별로 학회장이 따로 있고, 저는 그것을 아우르는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탁월한 업적을 낸 연구자를 시상하는 Toynbee Prize Foundation과 세계역사학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f Historical Sciences)의 이사직도 맡고 있습니다.



 학술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면, 역사와 기억의 관계, ‘메모리 스터디즈’ 연구를 하고 계신데요. 교수님의 최근 연구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세부적인 주제로는 2차 대전이나 제노사이드(특정집단에 대한 대량학살),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연구를 하고 있어요. 홀로코스트의 세계화, 보편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지요. 2차 대전을 기억하는 데 있어 홀로코스트가 중심이 되어 있는데, 그 경험마저 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보편화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 서술뿐 아니라 인류의 기억마저도 서구의 관점에서 돌이켜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지요. 이에 대해 동아시아를 비롯해 식민지를 경험했던 사회의 탈식민적인 성찰이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편제된 ‘기억의 서구중심주의’를 어떻게 넘을 수 있는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기억과 역사의 관계, 세계적인 관점에서의 ‘글로벌 메모리’는 하나의 근대 국민국가의 집단 기억이 아니라 다른 사회의 기억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에서의 제국에 대한 기억을 알아야 하는 것과 동일하지요. 그러니까 한국의 기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한국사에 천착해선 안 되고 일본이나 중국의 기억도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세계적인 이슈가 된 것은 구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계기로 합니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내셔널리스트들의 코소보, 이슬람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도 고조된 것이지요. 한국이나 동아시아에서 벌어졌던 식민지 시대의 기억의 형성과 작동과정도 세계적인 관점, 즉 글로벌 메모리 스페이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관점은 둘 째 치더라도 실증적으로 그런 것들이 맞닿아 있는 것을 잘라 버리고 볼 수 없어요.


 ‘메모리 스터디즈’, 기억과 역사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 대중들에게는 생소한 분야일 듯합니다. 보통의 역사 서적은 서양사, 동양사, 한국사 등으로 구분되어 있거나 국가 혹은 민족을 기본 단위로 하니까요. 새로운 역사연구의 틀을 주장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서강 사학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학부나 대학원이나 한국사, 서양사, 동양사로 나뉘어져 있긴 하지만, 세 분야가 단절되어 있기보다는 대화를 하던 전통이 있었습니다. 1960~70년대 사학과의 길현모 선생님이나 차하순 선생님이 유신을 정당화 하기 위해 역사에 민족주의를 동원 할 때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았던 사회적 전통도 있어요. 다른 대학의 사학과에서 성장한 학자들보다는 민족주의에 대한 것에 훨씬 더 비판적인 흐름이 있었고, 그 당시 선생님들께선 기존의 한국, 서양, 동양이라는 인위적인 역사연구 구분을 넘어서 서로 교류하며 역사를 보셨던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 학계는 글로벌 히스토리나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공부를 하는 것이 대세인데, 이런 기형적인 삼분과 체제는 한국의 역사학이 세계적인 흐름에 공조하는 데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과 별로 역사연구를 하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밖에 없습니다. 모두 일본 제국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다른 나라 사학과의 경우 모두 주제에 따라서 공부를 합니다. 예컨대 ‘식민지 시대 동원의 역사’를 연구한다고 하면 ‘미국에서의 동원’, ‘동아시아에서의 동원’ 식으로 연구의 기본 단위가 국가나 민족이 아닌 주제인 것입니다.


 ‘학술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면, 역사와 기억의 관계, ‘메모리 스터디즈’ 연구를 하고 계신데요. 교수님의 최근 연구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서세부적인 주제로는 2차 대전이나 제노사이드(특정집단에 대한 대량학살),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연구를 하고 있어요. 홀로코스트의 세계화, 보편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지요. 2차 대전을 기억하는 데 있어 홀로코스트가 중심이 되어 있는데, 그 경험마저 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보편화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 서술뿐 아니라 인류의 기억마저도 서구의 관점에서 돌이켜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지요. 이에 대해 동아시아를 비롯해 식민지를 경험했던 사회의 탈식민적인 성찰이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편제된 ‘기억의 서구중심주의’를 어떻게 넘을 수 있는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기억과 역사의 관계, 세계적인 관점에서의 ‘글로벌 메모리’는 하나의 근대 국민국가의 집단 기억이 아니라 다른 사회의 기억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에서의 제국에 대한 기억을 알아야 하는 것과 동일하지요. 그러니까 한국의 기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한국사에 천착해선 안 되고 일본이나 중국의 기억도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세계적인 이슈가 된 것은 구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계기로 합니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내셔널리스트들의 코소보, 이슬람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도 고조된 것이지요. 한국이나 동아시아에서 벌어졌던 식민지 시대의 기억의 형성과 작동과정도 세계적인 관점, 즉 글로벌 메모리 스페이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관점은 둘 째 치더라도 실증적으로 그런 것들이 맞닿아 있는 것을 잘라 버리고 볼 수 없어요.


 그렇다면 ‘세계 역사’가 현 역사관의 대안적 역사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세계 역사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한국사 연구자 한 명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내셔널리즘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지만 이미 방법론적 민족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난 민족주의가 아니야” 라고는 하지만, 이미 ‘한국사’를 연구한다고 하는 순간 다른 역사와의 연관성을 잘라버리는 것이지요. 학부 때부터 ‘나는 한국사가’라고 훈련을 받으니 다른 국가나 지역에 대한 연구를 등한시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데 소련이나 미국의 자료가 필수적이고, 국제 전쟁인 만큼 다른 국가들에 대한 이해가 역시 필요하지요. 이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역사연구는 너무나 상식적인데도 불구하고 삼분과라는 편제가 그런 상식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각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증주의라고 하더라도 관련 자료는 다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는 양쪽 사이의 연결을 조명합니다. 가령 일본 제국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일본사 말고 인도네시아, 만주, 한반도, 타이완 모두를 보는 것이지요. 일본사를 연구한다고 해서 일본제국의 문서만 봐선 안 됩니다. 분과의 틀에 갇혀 있는 한 연구대상이 편협할 수밖에 없고, 역사연구에 있어 이데올로기적으로 민족주의를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방법론적으로는 민족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역사 연구에 있어 무수한 연결지점들을 봐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연구는 차치하고서라도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연결의 범위를 어디까지 보고, 가르쳐야 할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역사 연구의 주제는 인간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역사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인류’가 그 대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패러다임으로 역사연구와 교육에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처럼 ‘Nation’이 역사의 대상이 된 것은 근대 민족주의적 역사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입니다. 지금의 역사 연구 역시도 근대에 와 ‘구성’된 것인데 마치 이것을 본질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세계 역사학자들이 지구의 역사를 써야 한다고 하는데, 꼭 주제가 그렇게 광범위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마포구의 역사를 세계 역사 입장에서 쓸 수도 있습니다. 절두산의 역사는 한국사인가요? 포교 활동을 하다 순교했던 서양 신부들을 이해하지 않고는 절대 쓸 수 없는 역사지요. 서강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립자인 미국과 독일의 신부를 빼놓고 서강의 역사를 논할 수 없습니다. 세계 역사의 가장 큰 오해는 전 세계를 역사서술의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는 퍼스펙티브, 즉 관점입니다. 내셔널 히스토리가 사일로의 역사, 단절의 역사라면 세계 역사는 연결의 역사이지요. 결국 모든 역사는 본질적으로는 트랜스내셔널한 것입니다. 그 연결고리를 어디까지 볼 것이냐에 대해서는 연구가 진행되면서 사안에 따라 역사가가 선택하는 것이지요.


 이제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학부시절에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교수님의 서강에서의 기억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 때는 유신 때라 대학이 학문적 자유를 박탈당하고, 긴급조치 세대니까 세 명 이상만 모여도 걸리고 해서 활동은 얘기할 것이 많지 않아요.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끔찍했지만 학교 내부는 상당히 ‘리버럴’, 즉 자유로웠지요. 선·후배 간 위계질서도 강하지 않고, 민주화 이후보다 오히려 자유로운 측면들이 있었습니다.

 교내에서는 <서강타임즈> 기자도 잠깐 했었고, <황토>라고 서강대 첫 번째 이념서클에도 있었지요. 서클 사람들이 긴급조치로 들어가는 바람에 서클이 와해된 이후로는 주로 혼자 공부를 했었습니다. 사학과도 당시 조금 자유로운 정도였고 저는 더 급진적이었으니까. 혼자 공부하다 다른 대학 전공자들과 스터디 하고 하는 형식이었지요.

 유신이라는 큰 억압이 있었지만, 그때 경험들이 큰 자양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혁명사 교수인 로렌스 스톤은 말년에 평생 혁명을 연구했는데도 자신이 혁명을 잘 아는지 모르겠다고 했었지요. 정작 자신은 혁명적 상황을 살아보지 못했으니까요. 그에 비하면 우린 얼마나 행복한 역사가입니까. 우리가 옥스퍼드의 좋은 인프라는 못 누렸지만 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돈을 겪었기 때문에 자기 사회 공부하고 신문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의 혼란은 좋은 역사가를 만들기 좋은 토양이었습니다. 요즘도 얘기합니다. 한국 역사가를 키우는데 가장 큰 적은 민주화라고요(웃음).


 학과 내 마니아층이 두텁기로 유명하십니다. 강의가 좋으시다는 평이 많은데, 따로 교수철학이 있는지요?


 특별히 그런 건 없어요. 단지 학생들에게 상식으로 생각되는 것, 고정관념을 깰 수 있도록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새롭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할 수 있게요. 공부야 자신이 자료를 찾고 하는 것입니다. 요새 인터넷도 발달되어 있고 하니 자료 찾는 것은 어렵지 않지요. 제가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생각하는 법과 분석하는 법, 즉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역사는 자료가 스스로 말해준다고 철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역사도 이론이 필요하고 관점이 필요한 데 말이지요. 저는 사과를 ‘따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따먹는지’, 혹은 ‘어디서 찾는지’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대학원 진학 및 학자를 꿈꾸는 서강 학우들이 많습니다. 학우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옛날 학부 다닐 때, ‘사학과 노래’란 것이 있었어요. “대한의 남성들은 사학과를 좋아해, 근데 사학과 좋아하면 굶어 죽어요.” 이런 노래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부르곤 했습니다(웃음). 공부를 한다는 것은 다른 많은 욕망들을 억누르고 진짜 한 번 걸어보겠다고 할 때 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보상은 적지만 지적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이 즐겁다면 해 볼만 한 직업이지요.


 그렇다면 학자가 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 혹은 덕목이 무엇일까요?


 지적 호기심이지요. 항상 궁금증을 갖고 계속해서 자기 공부를 발견하고 해야 합니다. 단순히 ‘교수가 되어야지’ 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면 절대 안 되고,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지적 호기심을 채우지 않으면 못 살겠다”는 각오로 해야지요.

 구체적인 능력에 대해선, 인문학 공부라는 것이 사실 잘 읽고 잘 쓰는 것입니다. 우선은 많이 읽어야 하고, 읽는 것도 좋아해야 하지요. 평소에 닥치는 대로 많이 읽으면 나름대로 감이 잡히게 돼요. 그 다음으로는 좋은 문장에 대한 욕망이 있어야 하겠지요. 좋은 글이 있으면 베껴 쓰고 싶고, 이런 것들 말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외국어를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외국어를 잘 하는 사람이 한국어도 잘 하는데, 다른 언어로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국어 표현도 느는 법입니다. 또 여러 언어를 해야 대학원에서 공부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것이지요. 차근차근 몇 개씩 언어를 해두면 상승작용을 일으키니까, 너무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집착을 하지 마세요. 영어를 파면 독어나 불어는 또 따라오게 됩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교수님께선 서강에서 학사부터 박사까지 다 마치신 만큼 서강이 주는 의미가 특별할 것 같습니다. 서강, 그리고 서강 동문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예전에 비해 학생들도 그렇고 동문들의 서강에 대한 자부심이 빛이 바랜 것이 아쉽지요. 우리 때는 규모는 작아도 서강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거든요. 예전에는 서강대 도서관이 최고였고 다른 학교 학생들이 와서 책을 보고 자료를 빌려가곤 했지요. 군사 독재 시절 미국인 신부가 총장을 하니까 서강대 도서관에 대해 간섭을 못했고, 검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어요. 유신 때 마르크스의 서적이 로욜라 도서관에 꽂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민주화가 되면서 서강대가 가졌던 장점, ‘자유로운 학풍’이 사라진 것이 아쉽지요. 재정적인 상황을 떠나서 서강의 힘은 돈이나 학교의 규모보다도 그 구성원들의 자부심에 있다고 봅니다. 자부심이 있어야 좋은 아이템을 선뜻 펼칠 수 있어요. 서강을 이끌었던 자유로운 기풍이 퇴색한 이유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하겠지요.




 글   | 윤상진 (학생기자, 사학 15) dhkqjs@sogang.ac.kr

 사진 | 임근택 (학생기자, 수학 11) lgt3238@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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