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선, 황유원 동문 (종교01)
작성자 서강가젯(Sogang gazette)
작성일 2020.09.17 10:32:49
조회 1,972



      

 살아 숨쉬는 언어로 단단한 사유의 세계를 펼치는 동문이 있다. 시인이자 번역가 황유원 동문(종교 01)의 시선(視線)을 따라 세상을 관조하는 시선(詩選)을 만나보자.



본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시 쓰고 번역하고 공부하는 황유원이라고 합니다. 서강대 01학번이고요, 종교학과 철학을 전공했어요. 영문학 수업도 다른 전공 수업만큼이나 많이 들었고요. 그리고 제가 서강대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공간이 C관에 있던 (지금은 없어진 지 한참 지난) ‘노고문학회’ 동아리방인데, 옛 선배들이 “우리는 서강대 졸업했다고 안 하고 노문회 졸업했다고 한다”라고 했던 말을 빌리자면 노문회 졸업생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참 정신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좋게 말하면 관심사가 다양하다고 할 수 있겠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산만한 성격. 졸업 후에도 한 우물만 판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남들과 다를 것 없이 주로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고요, 남는 시간에는 공부를 하거나 이런저런 원고를 쓰고 있어요. 프리랜서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인데, 요즘에는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졌네요.
 원래 올해에는 긴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웠었어요. 일이 개입되지 않은, 말 그대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여행을요. 정신적으로 늘 주로 영미권에만 머무는 느낌인데, 거기서 좀 벗어날 겸, 그리고 ‘야생의 감각’도 회복할 겸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땅으로 가보고 싶었죠.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유적지들을 따라 걷고 싶었어요. 그래서 틈틈이 실크로드 관련 책들을 보며 공부도 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기면서 그 꿈은 잠시, 어쩌면 오랫동안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오는 실망감과 답답함이 좀 커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예전에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되새기고, 또 그때를 복기하게 되는 것도 같아요.



▲ 황유원 동문(종교 01)


 ― 황유원 동문은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첫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로 제34회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세상의 모든 최대화』,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등이 있다. 서강대학교에서는 종교학과와 철학과를 전공했다. 졸업 후 인도철학과 박사과정을 밟았으며 현재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김수영 문학상 심사평에서 시인이자 평론가 서동욱 심사위원은 황 동문의 시에 대해 ‘가식 없이 절실한 시적 정황들이 주는 무게감을 시편 하나하나가 고르게 성취하고 있는, 진지한 세계가 매우 드물고 값지다’고 표현했다.



스스로가 생각하시는 동문님 시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음, 어려운 질문이네요. 원래 자기가 자기를 잘 모르기 마련이니. 그래도 제 시만의 특징이 몇 가지 있을 것 같긴 한데, 일단 ‘실시간 시’라는 점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쓴 많은 시는 명백히 ‘실시간 시’입니다. ‘실시간 시’란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귀에 들려오는 소음들과 낯선 사람들의 말소리, 그와 동시에 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관념들을 그냥 한 덩어리로 뭉쳐서 기록하는 시를 말해요. 엄밀한 의미에서는 저의 창작물이 아닌 거죠. 말 그대로 일종의 기록입니다. 제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을 최대한 배제한, 나름 실험적인 시작 방식이죠. 갑자기 어떤 리듬에 들리면 그런 시들이 써지곤 해요.
 한창 그런 시를 많이 쓰던 시절에는 퇴고를 정말 싫어했어요. 나의 하찮은 생각보다는 최초의 리듬을 존중했거든요. 밤을 새워가며 자르고 덧붙인 시는 실은 거짓말의 결정체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장시(長詩)’를 많이 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퇴고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기분이 영 별로네요.

 그리고 제 시의 키워드를 물으셨는데, 아무래도 '자유'가 아닐까 싶어요. 실은 첫 시집에서 제가 했던 중요한 시도들도 경험주체로서의 나와 인식주체로서의 나 사이에 일종의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나 자신을 나 자신의 ‘구경거리’로 만들기 위한, 그리하여 결국에는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었거든요. 실은 종교학과 인도철학을 공부했던 것도 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여전히 답답하기만 하네요. 답답하지 않으면 시도 안 쓰겠지만.




일상의 경험이 생각을 호출하고, 생각들이 서로 엮이는 것을 구경하는 일이 흥미롭습니다. 동문님은 평소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시나요?


 영감은 늘 뜻밖의 장소와 시간에 찾아오는 것 같아요. 아주 바쁘면 시를 못 쓸 것 같은데 그런 와중에 시를 써내기도 하고, 반대로 여유로우면 시를 많이 쓸 것 같은데 또 전혀 그렇지 못하기도 하고. 대중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가 시를 시작하는 지점,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시가 시작되는 지점은 당연하게도 늘 언어인 것 같아요. 경험이 아무리 시적이라고 한들 그것을 받쳐주는 언어가 없으면 바로 주저앉아 버리고요, 아주 사소한 경험이더라도 언어가 받쳐주면 아주 멀리까지 뻗어 나갑니다. 스스로 변주되면서 어떤 구조물을 이루는 지점까지 자라나는 거죠.


‘여행’도 동문님의 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 같습니다. 여행은 동문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아까도 잠깐 실크로드 이야기를 했는데요, 여행은 사실 저의 모든 것이었어요. 과거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어서 안타깝네요. 제가 서강대를 팔 년이나 다녔는데, 그게 다 여행비를 벌어서 중간중간 여행을 하느라 그랬던 거였어요. 삼십 대에도 여행을 떠나긴 했지만, 이십 대 때 유독 힘들게 했던 여행들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졸업하고 들어간 곳도 여행 잡지사와 여행 에이전시였어요. 물론 둘 다 금방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저의 개인적인 여행관이 쓸데없이 너무 뚜렷했던 탓이죠.
요즘은 예전에 떠났던 여행들을 복기하고만 있는데, 특히 재작년에 갔던 이탈리아의 아시시를 자주 떠올립니다. 열여섯 개 성당에서 일제히 울려 퍼지는 열여섯 개 종소리를 매일같이 듣고 자란 새들의 그 비행이란… 성 프란치스코를 생각하면서 봉쇄수도원까지 혼자 땀 흘리며 걸어 올라갔던 그 길을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걷고 있어요.


서강은 동문님께 어떤 의미였으며, 시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저는 원래 어디에도 소속감이 없는 인간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그러한데, 제가 인생에서 딱 한 번 소속감을 느꼈던 때가 서강대 학생이었을 때였어요. 특히 노고문학회에서 보낸 시간들을 잊지 못하죠. 그야말로 낭만적인 한때였고, 그 이후로는 낭만이라는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네요. 제가 쓴 시들에 ‘너’라고 불리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그때 만난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종교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말 그대로 축복이었습니다. 천주교 집안이어서 세례를 받고 성당을 다니긴 했지만, 사실 그냥 놀러 다닌 거지 종교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거든요. 그랬던 것이, 1학년 때 길희성 교수님의 ‘종교와 문화’ 수업을 들으면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길희성 교수님의 힌두교 수업과 불교 수업에 충격을 받았죠. 그때 처음으로 세계관이 흔들렸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종교가 없음에도 지극히 종교적인 인간이 되었어요. 힌두교 문헌들을 읽으려고 산스크리트어를 배웠고, 인도의 골목길과 미얀마의 옥탑방에서 들은 ‘아잔’에 황홀경을 느껴 아랍어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에요. 시에서도 그런 종교적 성향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입니다.




어떻게 시인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저는 원래 화가나 곤충학자가 되고 싶었지 시인이 되길 바란 적은 없었어요. 국어 시간에도 현대시보다 고려가요를 훨씬 더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동아리방에서 처음으로 시집이라는 걸 구경하고는 ‘나도 저런 걸 갖고 싶다’라는 생각이 막연히 들더군요. 시집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던 때라 우선은 교내 문학상인 청년문학상에 응모해보자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바로 응모했는데, 놀랍게도 가작에 선정됐죠. 더 놀라운 건 심사평이었어요. 당시 국문과 교수이자 시인이신 김승희 선생님께서 심사를 보셨는데, “발상이 전율적일 정도로 아름다운데 1연이 진부하고 산만하여 가작에 머무르게 되었다”라는 심사평을 써주셨어요. 흔해빠진 진부함과 강렬한 개성이 공존했다는 것인데, 거기서 진부함을 덜어내고 무엇이 저의 개성인지를 인지하기까지는 무려 십 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네요.
 졸업 후 직장을 다니면서도 계속 혼자 쓰고 투고하기를 수년 동안 반복했어요. 그렇지만 소위 ‘예심 통과’를 한 적은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그 정도 성적이면 시에 별 재능이 없다고 봐도 무리가 없었죠. 그럼에도 크게 기죽지 않고 계속 썼던 것은 순전히 시 쓰는 게 좋아서였어요. 그리고 김승희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칭찬이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요. 심사평에 쓰신 ‘전율’이라는 단어가 좋았습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예술적 경험이란 곧 전율을 의미하거든요.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 그때 그런 말을 듣지 않았어도 계속 시를 썼을지. 어쨌든 말의 힘은 참 무서운 것 같아요.


‘시’는 동문님께 무엇인가요?


 여행을 많이 다녔음에도 여행 산문은 별로 쓰질 못했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제가 중요한 순간은 산문으로 기록하길 꺼리더라고요. 오랫동안 시를 써온 버릇 때문인지, 웬만한 일은 다 시의 형식으로 기록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시는 곧 저의 목소리예요. 약간 과장하면, 저는 시로 말할 때만 진정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일들이 다 시가 되진 않는 듯해요. 행과 연을 나눈다고 해서 다 시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제가 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특히 결말입니다. 시는 잘 시작돼요. 하지만 머지않아 주저앉고 맙니다. 언어와 사고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거죠. A4 용지 몇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마구 써대다가도 결국에는 도중에 길을 잃고 말아요. 예전에 김승희 시인께서 “시에는 절벽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무척 공감했고 지금도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시는 끝나는 순간 아득해져야 해요. 끝난 다음이 천 길 낭떠러지든 광활하게 펼쳐진 설원이든.

 




*



  황유원 동문은 또한 번역가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모비 딕』, 『밥 딜런: 시가 된 노래들 1961~2012』(공역), 『예언자』, 『소설의 기술』, 『올 댓 맨 이즈』, 『밤의 해변에서 혼자』, 『시인 X』 등 많은 책을 새로운 언어로 옮겼다.




번역가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번역은 어떻게, 왜 시작하게 되셨나요?


 오래전에 잠시 하던 출판 에이전시 일을 관뒀을 때, 그 사실을 안 어느 출판사 편집자분께서 번역 일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던 적이 있어요. 이탈리아에 대한 책이었는데, 그분께서 제가 이탈리아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셨거든요. 첫 번역이니만큼 잔뜩 긴장한 상태로 두 달 동안 번역에만 매진하고서 원고를 넘겼는데… 결국 출판사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전화를 했더니 없는 번호라고 하더군요. 계약금 정도밖에는 못 받았고 책도 안 나왔죠. 어쨌든 그게 처음으로 했던 단행본 번역이었네요.
 그 이후로도 몇 년간 음원사이트 회사에서 영어 가사를 번역하는 일을 했고,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면서 주로 영어로 된 연구서와 논문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등단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첫 책을 냈던 출판사 편집부에 영어를 좀 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어필했죠. 저로서는 이례적인 행동이었는데,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고서 일 년이 지난 후에 놀랍게도 번역 의뢰가 들어오더군요. 물론 결과적으로 첫 번역서는 다른 출판사에서 먼저 나오게 되었지만요.

 지금은 번역이 제 직업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아무래도 직업이라고 하기 어려우니까요. 외국의 좋은 문학 작품들, 특히 미지의 시집들을 계속 한국의 독자들께 소개하고 싶어요.


번역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번역, 특히 문학 번역을 '연기'에 비유하곤 해요. 제가 잠시 그 작가 역을 맡아서, 그 작가의 문장을 한국어로 다시 연기하는 것이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종교학자가 되려면 모든 종교를 90프로 정도 믿을 수 있는 종교적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번역가도 여러 작가를 흉내 낸다는 점에 있어서 그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어느 종교학자라도 모든 종교를 100프로 믿을 수는 없듯이 번역가도 번역을 할 때 그 작가가 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떤 작가가 어떤 작품을 썼을 시기의 정신 상태를 조금이라도 흉내 내보려는 노력, 최소한 그 언저리에라도 머무르면서 그 상태를 계속 쳐다보려는 노력은 번역가로서 지녀야 할 필수적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모비 딕>을 번역했을 때는 고래나 포경에 관련된 책과 영상을 수시로 찾아보고 성경과 셰익스피어도 계속 뒤적거리면서 그 당시 멜빌이 지녔을 정신 상태를 흉내 냈어요. 동시대 작가들의 경우에는 출간 당시의 인터뷰 자료가 많기 때문에, 그것들을 열심히 읽으면 저도 모르게 작가의 정신 상태에 어느 정도 동화되는 면이 있고요.

 시를 쓰기도 하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바로 언어유희의 번역입니다. 번역을 하다 보면 한국어로 흉내 낼 수 있는 언어유희가 있고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언어유희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늘 최대한 흉내를 내보려고 노력해요. 맥스 포터, 엘리자베스 아체베도, 앤 카슨의 ‘시소설(verse novel)'을 번역할 때 특히 그랬던 것 같은데, 실은 그럴 때가 번역하면서 가장 신나고 재미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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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힘들다’고 표현하는 요즘입니다. 이런 때에 읽어보기를 특히 권하고 싶으신, 소개하고 싶으신 시가 있을까요?


 요즘에는 아무래도 야외 활동이 예전보다 줄어들었고, 어쩔 수 없이 집에 계시는 분들도 많을 것 같아요. 자칭 ‘집사람’인 저도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네요. 그런데 저는 ‘집사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입니다. 은둔하면서도 그렇게 놀라운 시들을 썼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져요. 황야를 본 적도 없고 바다를 본 적도 없지만 헤더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파도가 뭔지 알았다는 사람. 물론 디킨슨은 자발적인 은둔을 했기 때문에 우리의 처지와 비교할 바는 못 되겠지만, 그래도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디킨슨의 시가 평소와는 좀 다르게 읽히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디킨슨은 아까 제가 말한 ‘절벽이 있는 시’들을 쓴 귀한 시인 중 한 명이에요. 단어 몇 개의 배치만으로 사람을 아득하게 만드는 신비를 경험해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또 생각나는 건 천상병 시인의 시들이에요. 다들 익히 아시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쉽고 간단하게 성취되는 자유의 세계를 보여주는 시들입니다. 편차가 좀 있긴 한데, 좋은 시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좋아요. 가슴이 뻥 뚫리는 이 느낌, 작아져서 오히려 무한대로 커지는 느낌…! 요즘처럼 답답한 시대, 속이 좁아지기 쉬운 시대에 우리에게 더 유효한 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천상병을 옛날 구닥다리 시인으로만 알고 계신 분들께는 ‘아마도이자람밴드’가 천상병의 시들로 만든 앨범 ‘크레이지 배가본드’를 들어보실 것도 강력히 추천합니다. 천상병의 아름다움에 이르는 멋진 가이드가 되어줄 거예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시는 방향이 궁금합니다.


 사실 지금껏 별 계획 없이 살아왔어요. 그런데 요즘은,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이 그려지는 놀라운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틈틈이 다음 시집(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마무리되고 나면 이제 다음 단계, 또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해요.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데, 어쨌든 다음 십 년 동안은 ‘앰비언트(ambient) 시’의 세계, 그리고 ‘에코포에트리(ecopoetry)’의 세계로 넘어갈 듯합니다. 이런 작업은 그 성격상 사운드 아트와의 연계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계속 공부도 병행할 것이고요. 어찌 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렵고 험난한 길로 가는 셈인데, 이제 거의 반평생을 살아버린 지금에 와서 느끼는 것은, 누가 알아주든 아니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하고 싶은 건 다 해보고 죽는 게 옳다는 거예요. 인생의 재미와 의미가 대단한 데 따로 숨겨져 있지 않다는 걸 알고 나니 오히려 더 용감하고 무모해질 수 있다고나 할까요.

 



  황유원 동문은 서강인에게 다음과 같은 인사를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황 동문을 비롯한 서강 가족 모두의 행보를 서강가젯이 응원한다.
“우선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를 선후배님들, 그리고 동기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어요. 만나지 않는다고 해서 과거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더 또렷해져서, 저는 자주 그 기억 속으로 들어가 있곤 합니다.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그리고 예전에 어쩌다 저와 같은 수업을 들으신 분들은 여기서 저를 보면 깜짝 놀라실 것 같아요. 엄청 모자란 아이였으니까요. 물론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그들에게, 그리고 모든 동문님께, 인생은 이처럼 농담이니 웃으며 살자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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